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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비치발리볼의 도입과 발전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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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admin

10월 9, 2020

한국 비치발리볼의 도입과 발전과정

우리나라의 비치발리볼을 총괄하는 ‘한국비치발리볼연맹’ 홈페이지에는

국 비치발리볼의 초창기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0년도에 한국비치발리볼연맹을 창립하여 제1회 비치발리볼 대회를 열었고
1991-1996년까지 각종 국내대회 개최 및 국제대회에 대표 팀을 파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한국비치발리볼연맹 홈페이지, 2019.1.12. 검색).

위 내용에 따르면, 우리나라 비치발리볼의 시작은 1990년 한국비치발리볼연맹의 창립 이후부터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비치발리볼이 도입된 것은 그보다 앞선 1989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치발리볼의 도입과 관련하여 1980년대의 신문 보도 자료를 분석하던 중

1989년도의 비치발리볼과 관련된 기사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기사에 따르면 1989년 8월 10-12일에 부산의 광안리해수욕장에서

비치발리볼 시범경기가 개최되었으며 이 대회에는 1970년대 여자 국가대표 배구선수로 활약했던

조혜정, 이은경, 서혜숙, 이명희와 부산 성지공고 배구단이 참석했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우리나라 비치발리볼의 공식적인 첫 발자국은 1989년 부산의 해변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그보다 앞선 1989년 5월의 한 신문 보도에서도 ‘모래밭 배구 국내도입 움직임’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간략한 비치발리볼의 역사와 경기방식 등을 소개하며

배구 선수들의 여름철 체력훈연의 일환으로 비치발리볼을 서둘러 도입해야 한다는 내용을 전하기도 했다.

이러한 내용에 미루어 볼 때, 이미 국내 배구계에서는 그 이전부터 비치발리볼의 존재와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그 결과 1989년 부산에서 시범적으로 비치발리볼 대회가 진행되었던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1989년 7월의 신문기사를 살펴보면 우리나라 비치발리볼의 도입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이 보도되어 있다.

매일경제 1989년 7월 20일자의 보도에 따르면, 미국과 남미에서 발생한 비치발리볼이 유럽과

캐나다는 물론 일본에서도 이미 인기 스포츠로 성장하고 있음을 소개하며 대한배구협회가

비치발리볼을 도입하기 위해 1989년 8월 중에 시범경기를 계획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이미 대한배구협회가 비치발리볼 규정집을 확보하여 각 실업팀에 배포했으며

1989년 여름 동안 전지훈련을 떠나는 팀들을 대상으로 시범경기를 치르고

그 성과를 평가하여 전국적으로 확산시킬 계획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을 살펴볼 때, 우리나라에 비치발리볼이 소개되고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이었다고 분석된다.

비치발리볼의 특성 상 기존 배구선수들의 훈련에 적합하다는 판단 하에 대한배구협회를 중심으로

비치발리볼의 도입과 보급을 추진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1990년을 전후하여 보급된 비치발리볼은 우리나라에서 어떤 발전과정을 거쳐 왔을까?

우리나라에 비치발리볼이 도입된 1990년 전후에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비치발리볼의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던 시기였다.

그리고 한국비치발리볼연맹이 창립된 1990년 이후 불과 2년 후인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비치발리볼은 이미 올림픽 시범종목으로 운영되었다.

이후 1993년 9월 24일에 비치발리볼은 IOC의 승인을 받아 1996년 아틀란타 올림픽의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이와 같은 시기적인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나라의 비치발리볼 도입과 확산 과정이

올림픽에서의 메달 획득을 위해 ‘전문적인 비치발리볼 선수 육성’이라는 방향성을 나타내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이 생긴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스포츠내셔널리즘의 목표는 스포츠를 통한 국위선양이었다.

그중에서도 올림픽에서의 메달 획득은 스포츠내셔널리즘이 추구하는 목표의 정점이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성공적인 대회 개최와 함께 종합 4위라는 성과를 거둔 이후였기 때문에

1990년대는 올림픽에서의 메달이 가져올 수 있는 유무형의 가치에 대한 기대감이

어느 때 보다도 고조되어 있던 시기였다.

따라서 상술한 의문은 올림픽의 신규 종목인 비치발리볼에 대한 투자와 이를 토대로 한 전문적인

선수 육성이라는 정책적 목표가 존재하지 않았을까? 라는 합리적인 의구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비치발리볼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드러난 현실은 앞선 기대감과는

사뭇 다른 상황이었다.

전문체육의 한 분야로서 우리나라의 비치발리볼은

여전히 초보적인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2019년 현재 우리나라에는 올림픽 정식 종목인 비치발리볼의 프로팀이나 실업팀이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동안 국가 체육정책의 관심 영역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국제경기 출전에 있어서도 기존 배구 선수들을 대상으로 선발위원회를 구성하여

남녀 각각 2명씩을 선발하고 이들이 단기간의 연습을 통해 국제대회에 출전하는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

열악한 저변과 국가 체육 정책의 무관심은 한국 비치발리볼의 경기력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치열한 경쟁을 토대로 체력과 기술을 겸비한 최고의 선수를 선발하는 다른 선진 국가들과는

비치발리볼의 경기력에 있어서 확연한 차이를 나타낸다.

예컨대 우리나라의 경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올림픽 본선에 진출한 사례가 없을 정도로

경기력에 있어서 국제적 수준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배구(Indoor Volleyball)의 경우 우리나라 여자 배구대표 팀이 올림픽 무대에서

4강에 오르는 등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전하고 있다.

역시 시스템과 정책적 집중도의 차이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FIVB에서 제공하는 전 세계 비치발리볼 선수별 랭킹에 있어서도 1위부터 20위권 사이에서

한국 선수들은 찾아볼 수 없다.

그만큼 우리나라에서는 전문적인 비치발리볼 선수를 육성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우리나라의 비치발리볼은 전문체육을 중심으로

성장해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의 비치발리볼은 생활체육을 중심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예컨대 비치발리볼이 처음으로 도입된 1990년대 초반부터 한강고수부지 등에서

비치발리볼 강습회를 열고 클럽을 구성했던 사실이 생활체육으로서 비치발리볼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대변한다.

특히 배구 국가대표 선수였던 조혜정은 은퇴 후 생활체육 강사로 활동하면서

우리나라 비치발리볼의 초창기부터 확산에 많은 기여를 해 온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조혜정과 함께 곽선옥, 김화복 등 왕년의 선수들도 비치발리볼 보급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1991년 7월에는 부산 광안리 해변에서 부산사회체육센터에 중심이 되어

제1회 부산시장배 시민 비치발리볼 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는 각 구별로 12개팀, 70여 명이 출전했다.

또한 같은 해 8월 31일에는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4개국 친선 비치발리볼 대회가 개최되었고

이 대회에서 소련과 이탈리아가 두각을 드러내었다.

주목 할 만 한 기록은 1992년 8월 20일부터 동대문운동장 인근에서 개최된

‘제3회 전국남녀 비치발리볼 대회’이다.

당시 출전 팀을 살펴보면 여자부에 미도파A, 미도파B, 이화여대, 명지대 혼성팀, 가나공사 팀 등이

출전했고, 남자부에는 홍익대, 경희대 팀 등이 출전했다.

대학팀과 일부 기업에서 팀을 출전시켰는데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비치발리볼의 초창기에는 일부 기업팀과 대학팀이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국내의 비치발리볼 붐을 이끌 것으로 예상되었던 이 대회는 1992년 이후 명확한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다.

또한 1992년 당시 대회에 참가했던 미도파나 가나공사, 이화여대, 홍익대, 명지대팀 등도

더 이상 비치발리볼과 관련된 기록을 찾아볼 수 없었다.

비치발리볼의 도입 초기에 잠시 구성되었다가 해체된 것인지,

당시 대회를 위해 일회성으로 구성된 팀이었던 것인지에 대한 결론은 후속 연구를 통해

규명해 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1995년에는 드디어 우리나라에서 올림픽 출전 포인트가 걸린 ‘넥스배 비치발리볼 월드챔피언십 대회’가

개최되었다.

1995년 7월 18일부터 24일까지 부산 해운대해수욕장에서 개최된 이 대회에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미국, 브라질, 이탈리아 등 남자 28개국 49개 팀이, 여자는 17개국 35개 팀이 참가했다.

하지만 이 대회는 우리나라 비치발리볼 역사 상 최초의 올림픽 출전권이 걸린 국제대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졸속 운영이라는 평가로 기록된 대회였다.

미숙한 대회 운영에 대한 평가뿐만 아니라, 개최 대행사로 알려진 ‘아이템 문화기획’이 개막일 전까지

국제배구연맹으로 송금했어야 할 우승 상금 15만 달러를 예치하지 않아

국제배구연맹으로부터 대회 승인 취소와 중단 명령을 받았다가 가까스로 송금하여 대회를 운영하는 등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주먹구구식 국제대회 운영을 통해 망신을 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비치발리볼이 도입되고 공식적인 비치발리볼연맹이 발족한 지

불과 5-6년여 만에 올림픽 예선 경기 격의 국제대회를 유치하고 개최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역사적 발자취의 시작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공식적인 첫 번째 국제대회를 부정적인 평가로 마무리 한 한국 비치발리볼연맹은

1996년 또 다른 시련을 겪는다.

바로 대한배구협회가 올림픽 메달이 걸려있는 종목인 만큼 선수 수급과 관리 등의 이유를 들어

흡수 통합 운영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것이다.

이로 인해 1990년 창립되어 우리나라 비치발리볼의 초창기 역사를 주도해 온 한국비치발리볼연맹은

대한배구협회에 흡수·통합되었다가 2004년 10월 재창립하게 된다.

이상을 정리해 보면, 우리나라의 비치발리볼은 1990년대를 전후하여 도입되었고

인도어 배구의 훈련을 위한, 또는 생활체육으로서 배구의 저변 확대를 위한 성격을 띠면서

확산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90년 한국비치발리볼연맹의 창립 이후 각종 국제대회 및 국내대회를 개최하는 등

비치발리볼의 저변확대를 기대했지만 우리나라 비치발리볼의 현실은 여전히 단 하나의 공식적인 팀도

존재하지 않는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다.

비치발리볼이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지 20여 년이 흘렀지만 우리나라는 아직까지도

올림픽 본선에 진출한 적이 없으며 다양한 마케팅 전략을 통해 높은 흥행성을 기대할 수 있는

스포츠로 성장하고 있는 국제적인 추세와는 달리 여전히 단발성 이벤트 경기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분석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카지노게임https://sporbahis10.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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